199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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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발행한 『초동회 소식지』 이후, 한국의 퀴어(비연속/연속)간행물의 문장을 수집하고 연결하는 공간입니다. 발견한 문장을 보내주세요.

결국 포즈와 의상을 조정하기 위해 그녀를 불렀다. 근심스런 우리들의 질문과는 달리 역시 그녀의 판단은 현실적이었다. “나 지금 갈아입을 옷도 없어. 어차피 〈버디〉도 모델료 줄 없잖아. 의상 살 도 없는데 그냥 벗고 하자. 웃옷만 벗으면 되니까. 창간호는 강한 인상을 줘야 하잖아?” (쿵~~ 모델옷 벗기기가 어렵다고 누가 그랬던가? 가난이 때론 좋은 효과를 줄 때도 있군.)

—『버디』 12호, 「포즈 정하기 – 의상 살 도 없는데 그냥 벗고 하자!」, 1999

솔직히 창간호 모델로 기용하면서 내심 망설였다. 소위 역사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의 첫 호에 양성애자를 쓴다는 것에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그러나 그녀가 양성애자라고 해서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역시 어려웠다. 그녀가 나와 달리 남자에게도 연정을 느낀다지만 나와 똑같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그녀의 양성애 성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레즈비언이라는 테두리에서 제외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버디』 12호, 「내가 바이라는데 왜 놀라지?」, 한채윤, 1999

전국적으로 153이라는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른 지역 153에도 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광주에 사는 누구누구인데요, 대전에도 많이 계시군요” 하면서 메시지를 남기는 거죠. 그렇게 교류시작되었고 각 지역 대표들끼리 모여서 “우리 전국 MT도 하게 됐죠. 그때가 아마 1997년 12월 달쯤이었을 거예요”

—『버디』 24호, 「빛동인광주 153전화사서함 모임역사」, 〈버디〉편집위원, 2003

세상 모든 것 다 없어도 좋으니 네가 내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 한 여성이 한 여성에게 절절하게 드러낸 고백 아닌가

—『버디』 24호, 「아! 눈물 나는 레즈비언 사극, 대장금」, 한채윤, 2003

당신 잡지는 쓰레기같어,,, 이반 업소 알려주는 것만 빼고,,,당신은,,, 잡지 발행자랍시구,,, 생각하겠지만,,, 만들려면 똑바로 만드는게 낫지 않나, 당신 성격은 잡지만 봐도 알겠군,, 이반 잡지 만드는게 쉬운거 아니라는 것 알지만,, 당신이 만드는 잡지가,, 일반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이반들의 얼굴이 될 수 있는 잡지를 그렇게 만드느니,, 그만두는 게 나을 듯 싶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리고 무슨 인권 운동가인 냥 행동하는 모습도 좋게 비춰질 리 없구,, 니 속엔 어떤 것들이 들었는지 몰라도,, 한 번 더 생각하구, 행동하길,, 충고차,, (최근 인터넷에 올라온 몇몇 분의 글입니다)

—『보릿자루』 21호, 「독자들의 한마디, ‘되먹지도 않은⋯’」, 2000

2000년 8월 26일 비오는 대학로를 가로질러 200여 명의 이반들이 짤막한 거리를 행진할 때도, 그 이듬해 2001년 9월 홍대정문에서 출발한 소규모의 행렬이 홍대 정문 앞을 벗어나지 못한 체 곧바로 유턴을 해야하던 순간에도, 그리고 또 그 이듬해 2002년 월드컵이 막 팡파르를 울리기 시작하던 그때 6월 8일, 이태원에서 제법 퍼레이드를 모양새를 갖추며 행진할 때도 세상 사람들은 놀라고야 말았을 것이다. “아니 우리나라에도 저런 동성연애자들이 행진을 하다니⋯”

—『보릿자루』 42호, 「조선의 호모종로를 주름잡던 날」, 김재원, 2003

“이해가 안되네요, 퍼레이드참여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있고, 선글라스를 낀 나라는 한국 뿐일거라고 생각해요. 퍼레이드는 일종의 커밍아웃으로 통하는데 한국은 아닌가봐요” 38세의 일본인 독립영화 감독 고히치씨의 말이다.

—『보릿자루』 42호, 「조선의 호모종로를 주름잡던 날」, 김재원, 2003

인터넷 등을 통해 초보이반을 유혹한 뒤, “애인하자”, “양자 삼아주겠다”라며 값비싼 물건들을 사주며 유혹한 뒤 자신은 사정상 잠시 집에서 나와 살고 있으며 얼마 안 있어 많은 재산을 물려받게 될거라고 하면서, 상대방이 자신을 부자로 믿게 만든 후 사정상 급하게 되었으니 잠시 소량(몇백만원-몇천만원)의 을 잠시 빌려달라고 한 뒤 통장으로 입금을 받는다.

—『보릿자루』 33호, 「이반 범죄자 수배」, 2002

이태원 게이바의 한밤의 스트립쇼(?)는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이 곳 이태원만이 지닌 자유분방함을 느끼게 하는 광경이다. 사진 촬영을 한 곳은 이태원의 게이클럽 ‘와이낫’이다. 문밖에서 봐서는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문을 열면 이 곳은 춤의 도가니다. 평일에는 한산하던 이곳이 주말만 되면 뒤집어(?)진다.

—『보릿자루』 33호, 「여기가 어디??」, 2002

세상이 삐뚤어졌으니 올바르게 산다는 건 세상의 기준에서 벗어나 삐뚤삐뚤하게 사는 것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삐뚤어진 마음으로 이렇게 삐딱삐딱하게 쓰여지고만 창간호! 아 – 뭔가⋯ 그윽하구나. 아, 참고로 여긴 뒷면이라능.

—『완전변태창간호, 뒤표지, 「가운데」, 2008

세상은 참 많은 것을 이리저리 토막내고 나눈다. 그중에는 정말로 나누어야 할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누지 않아야 될 것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종교, 인종, 성정체성, 성별 등] 정당화되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나눔은 이것에 의해 배제된 자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성소수자 사이에서도 수많은 나눔이 이루어진다] 그 나눔들, 경계들을 이리저리 폴짝폴짝 정신사납게 완전변태답게 뛰어다니며 경계 자체에 혼선을 일으키고 마침내 와르르 무너뜨리는데 눈곱만큼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 창간호의 주요 테마를 가운데로 정하게 되었다. 함께 정신줄 안드로메다 저 멀리 좀 놓아두고 폴짝폴짝 뛰어넘어보자.

—『완전변태창간호, 「가운데」, 2008

안전지대는 시간과 홍보의 부족으로 쉽게 접하기 힘든 여성 영화게이, 레즈비언 영화, 서적들을 보급하기 위해 우편 발송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필요 없이 버리실 물건이나 새것으로 바꾸어 불필요해진 기재들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복사기, 팩스, VTR, 캠코더 등) 신분의 노출이 걱정되거나 용기가 없어 쉽게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안전지대는 우편사서함을 개설해 놓고 있습니다. 이성애라는 남성 중심의 다수를 위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집단과 여성의 평등한 지위 향상을 위해 우리가 벌이는 의식개혁 인권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분이라면 후원 또는 어떤 식의 참여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안전지대창간호, 「안전지대는」, 1997

1997년5월 21일로부터 태어난 안전지대는 이제껏 비활동적이고 음성적이던 부산, 경남지방레즈비언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꼭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여성으로 겪는 사회적인 사회적인 부당함 등을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별성정체성을 떠나 이반인(二般人)인 우리가 일반인이라고 하여 배척하지 않으며 다수인 그들 속에서 당당한 인격체로서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 자신부터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자신을 바라보아야 되지 않을까.

—『안전지대창간호, 「내는 글⋯.」, 1997

레즈비언 섬을 발견하다. 암흑 같던 어둠을 뛰쳐나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이 자신스스로가 열어가고자 방황해야 했던 수많은 날들⋯ 한국 최초 동성애 전문 잡지 버디세상에 나오면서, 어둠의 빛처럼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문을 두드린 레즈비언 모임 안전지대⋯ 새내기-신입-여러분이 많은 상담과 회원가입과 모임에 대한 문의를 해옵니다. 벅찬 감동과 반가움 이전에 빈 구석을 메워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찾아나갈 정도로의 모임의 내용과 허전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안전지대』 9호, 「글: 회장 블랙」, 1998

알립니다! 매월 정모 때 회원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던 [버디]를 다음 정모(9월)때부터 제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일은 8월 정모 때 회원들의 과반수 이상 찬성으로 결정된 일이며, 이번 버디 배포 중지의 취지는 첫째, 회원들이 버디일반 서점에서 직접 삼으로써 조금씩 커밍을 하는 기회를 늘리고자 함이요, 둘째, 열악한 안전지대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매월 버디 대금으로 나갔던 은 매월 (정모 참석자수) X ₩4,000으로 계산하여 안전지대미래(사무실까지는 아니더라도⋯)를 위한 통장을 따로 만들어 적립해 나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이해와 도움을 바랍니다.

—『안전지대』 9호, 「7월 정모 및 9월 M.T 지출 내역, 총무부」, 1998

“여보세요?”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는 분명히 호출을 했었을 그 장본인은 전화를 받지 않고 엉뚱한 꼬마 아이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뿔싸!’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어야 옳은 일이건만,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꼬마의 아빠가 내게 호출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혹시 아빠 계세요?”라고 물었고, “네, 목사님요? 우리 아빠 목사님인데요” 그 꼬마는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대답을 또박또박했다. 엉겁결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난 뒤 밀려드는 그 후회스러움⋯ 그리고⋯ 예의 그⋯ 불쾌감⋯.

—『우리누리』 봄호, 「혹시 목사님도 호모세요?」, 보릿자루, 1998

나-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겨울호 우리누리가 나온 뒤로 내 머리 속은 온통 회지 생각뿐이었다. 얼떨결에 맡게 된 편집은 겨울호의 어눌함에 이어 이번 봄호에선 고통으로 이어졌다. 겨울호에서의 어눌함을 다신 반복치 않으리란 내 앙탈스러움은 겨울호가 발간된 직후부터 기사 모으기, 편집 공부, 나중에는 프린터기까지 사게끔 만들었다. 모든 것을 나 혼자서 해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나중엔 오기로 바껴서 일의 추진력이 되었는데⋯⋯ 컴맹에 가까웠지만 회지 특성상 일반 친구들에게 편집의 know-how를 문의하기도 어려웠던지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더딘 작업이 요구되었다. 마지막 일주일간은 먹고, 자고 씻은 기억이 별로 없다.

—『우리누리』 봄호, 「편집후기」, 1998

대경회’가 1년의 역사를 갖게 되고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은 한국 동성애 역사 발전에 큰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 중심의 동성애 문화에 목말라했던 지방동성애자들도 이제는 보수적인 지방색을 이기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말이죠. ‘대경회’를 선두로 다른 많은 지방에서도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시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을 시작한 ‘대경회’회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더욱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레즈비언들도 ‘대경회’를 위해 큰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고요. 저희 ‘끼리끼리’와도 긴밀한 교류가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한국 여성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끼리끼리’회장 전해성, 1997

진심으로 대경회 모임 결성 1주년축하하며 한없는 애정과 신뢰를 보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건 동성애자들이 연결망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서울에 편중된 현재의 동성애자 문화에서 지방모임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더욱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꾸준히 모든 동성애자들을 위해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을 모색하고 그에 따라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을 바랍니다. 아울러 동성애자들의 전국적인 연결망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서울시립대학교 동성애자 모임레스보스’대표 양지용, 1997

안녕하십니까? ‘컴투게더’대표 한종우입니다. 대구경북지역 동성애자 모임인 ‘대경회’의 1주기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해방의 그날, 여러분들과 함께 둘러앉아 오늘의 어려움을 회상하며 웃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연세대학교 동성애자 모임컴투게더’대표 한종우, 1997

대구경북지역 동성애자 모임인 ‘대경회’의 1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또하나의 사랑1주년 기념 모임에서 회장님을 통해 ‘대경회’가 지방을 중심으로 의욕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동성애자 단체들이 수도권에 집중되어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대경회'의 그와 같은 활동은 매우 고무적 활동이라 생각됩니다. 아직까지 ‘대경회’와 ‘또하나의 사랑’사이의 눈에 뛰는 교류는 없었지만 앞으로 우호적인 동반자로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무쪼록 1주년을 맞이한 ‘대경회’가 지방에 거주하는 많은 동성애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서 지방의 중추적인 모임으로 계속 발전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대경회1주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하이텔 동성애자모임또하나의 사랑’ 시샵 저스티노, 1997

바다내음 가득한 부경지역의 ‘같은마음’의 서린이입니다. 모든 생명들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려는 5월, 그 5월에 ‘대경회’가 1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우선 축하드립니다. 하나의 목소리는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모이게 되면 그것은 함성이 됩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모이게 되면 그것은 함성이 됩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서로 갈라짐이 아닌 하나됨의 목소리 함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보다 밝은 빛의 우리가 되는 그러한 ‘대경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대경회1주년축하드리며.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같은마음 서린이, 1997

대경회가 새로운 소식지를 발행한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축사를 올립니다. 해마다 한국 귀국 길에 발전해 나가는 서울동성애 인권운동 단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감격하기도 또한 걱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교적 사상으로 봉건적인 사회에서 자리잡게 되었던 동성애 단체의 의지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반면에 날이 갈수록 ‘서울’ 중심으로만 몰려지게 되는 현 동성애 인권운동지역성은 지방에 계신 동성애 동포 여러분들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될 수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구경북지방에서도 자치적인 동성애 인권 소식지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누리1』 「인간적인 정으로 이어주는 소식지가 되기를 바라며」, 장진석, 1997

컴퓨터 작업 일주일 동안 해놓은게 다 날라가서 급하게 모임 당일 날 프린트 완성하느라 오타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12월달에는 “오타 부인”을 잡아주실 분 모이세요!! 지킴이. 부지킴이 살려주세요

—『한우리소식뒤표지, 1997

같은마음’은 부산경남지역에 흩어져 있는 이반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하는 작은 출발입니다. 동성애는 절대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마음창간호, 앞표지, 1996

애널섹스는 그 자체로서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걸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그 성행동을 행하는 파트너들끼리 알아서 결정할 문제이다. 설령 그들이 엉덩이를 후려갈기고 오르가즘을 얻든, 아니면 피를 봐야 오르가즘에 도달하든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애널섹스를 그렇게 파트너들끼리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자유로의 합의 사항이라 치부하고 넘겨버리는 건 어리석은 일인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가 큰 쪽은 애널섹스를 파문하는 게이들이었던 듯하다.

—『같은마음』 5호, 「내가 게이들에게서 증오하는 열 가지의 것들 2」, 서동진, 1997

11월 23일,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정기모임이 있는 날.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범일동에 위치한 텔레폰이라는 곳의 문을 열었지만, 막상 나를 맞아주는 건 썰렁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룰루랄라~~” 히죽거리며 “송지나의 취재파일”을 봤다. 4명의 여성들이 얼굴을 공개하고 자신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그들이 TV라는 파급효과가 큰 매체에 COMING OUT(커밍아웃-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용기가 필요했을까? 방송이 나간 후 겪었을 부당한 대우와 주위의 시선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한두 명씩 사람들이 들어섰다.

—『같은마음』 7호, 「첫번째 만남」, 낮은 목소리, 1998

“그래. 나도 분명 가 있어 화려함. 황홀함을 구하는 가”

—『한울타리』 6호, 뒤표지, 1999

난 아무것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씩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날 위로하려 들거나 감싸 안으려 들때까지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 곁에서 조용히 두 손으로 감긴 내 두 눈을 쓰다듬어올려주는 손이 있습니다. 한울타리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의 손길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작은 바램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울타리』 6호, 뒤표지, 1999

이반이어서 외롭고 우울하니까 나는 많은 일을 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을 폭넓게 알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보이지 않게 사랑함으로 아픈 만큼 사람을 이해하고, 상처를 어루만져 줄줄 알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보도블럭 사이에 핀 꽃을 발로 차지 않고, 한참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아픔과 슬픔만큼 기쁨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가마타는 즐거움 뒤에 가마 매는 괴로움도 있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사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오래오래 보게되면 된다는 믿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하고, 사랑의 힘을 믿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인간적이란 말”의 뜻을 알게 해 주어서. 이반이어서, 이반이어서..

—『너와나창간호, 「⚨.이반이라서⋯..」, 하섭님, 1999

음⋯. 이반 세계를 알고 몇 번 이태원을 다녀왔지만 사실, 아직도 그곳에 대해 뭐라고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다. 갈 때마다 이태원이 내게 주는 느낌은 달랐다. 처음엔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세계 같은 느낌이 들었고 다음엔 차차 호기심 어린 곳이 되었고, 때때론 이반세계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 같은 회의를 들게 하였고, 어쨌든 지금은 심각하게 생각 않기로 했다. 일반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고, 마시고 도 부려볼 수 있는 장소가 내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와나창간호, 「필이가 이태원에 간 까닭은?」, 유필, 1999

인권운동이 무엇이고, 그것이 대체 게이들인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었는지 물어보는 사람에게 일일이 대꾸할 필요도 없다. 이태원이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지, 그들이 발 딛고 춤추고 새벽이 무너지도록 연애하고 있는 그 곳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굳이 말하지 말자. 그저 김빠진 맥주 맛처럼 진행되는 느슨한 한동협.

—『너와나창간호, 「혁명의 기억속으로? 너희는 아침의 나라 한동협 1주년 기념식을 아느냐?」 (친구사이 6월 소식지 내용 재수록), 1999

WHY NOT의 회지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회지 발간을 계기로 WHY NOT이 힘들고 외로워하는 사람들의 편안한 휴식처로 더욱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항상 노력하는 WHY NOT의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와이낫창간호, 광주전남153빛동인모임지기 스탤론, 1998

와이낫 회지 첫 발간 축하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같은마음 여성부의 스컬립니다. 대구경북지역 여성이반모임 와이낫 첫 회지 발간 축하드립니다. 알찬 회지 되길 바라구요. 회지 발간 중 어려운 일 많더라도 꼭꼭 잘 극복해나가시길 빕니다. 와이낫 번창하십시오!!

—『와이낫창간호, 부산경남이반모임 같은마음, 1998

세상살기가 점점 힘들어져서 레즈비언들의 걱정되는 시기입니다. 아무래도 여자사회적으로 혼자 살기 힘드니까요. 더더군다나 레즈라면? 하지만⋯ 여태껏 독신녀는 있어왔고 어떻게든 살아있듯 우리도 잘먹고 잘살겁니다. 더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땡땡하게 뭉쳐있으니까요. whynot 회지 탄생을 축하하며⋯ 회지는 한 권 보내주시는거지요?

—『와이낫창간호, 니아까 편집장, 1998

저번에 서울퀴어영화제에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레즈비언 영화를 찍을 때 가장 어울리는 배우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난 그 질문에 대해 강!부!자!라고 외쳤다. 장난이 아니라 나의 불만은 왜 레즈비언으로 나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쭉쭉 빠지고 이쁘고 멋진 여자들뿐이냐는 것이다. (⋯) 레즈비언 중에 변정수나 진희경같은 스타일의 여성은 거의 없다는 것. 그걸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니아까』 4호, 1997

니아까는 오징어, 떡뽁기, 머리띠 같은거 파는 리어커에서 따온 말로 다양함을 담아내는 문없는 대중잡지임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니아까』 5호, 앞표지, 1997

가끔 나보다 어린 부치들에게 난 이상한 말들을 듣는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들에겐 누나라고 부르고, 나이가 많은 부치들에겐 형이라 부르고⋯ “들이 알아서 뭐해? 이건 부치끼리 하는 얘기야”하면서 야한 이야기나 하고 자기는 화장하는게 귀찮아하고 싫어하면서 들에게는 화장을 강요하고 예쁠 것을 강요하는⋯

—『니아까』 8호, 「너, 마쵸지?」, 깨트펑, 1998

게이들에게는 사우나탕도 있고 극장도 있다. 게이바레즈비언바의 수배이다. 게이 커플은 최상의 커플이라 한다. 이 사회남자들이 훨 을 많이 버는 사회이고 애도 없는 게이 커플은 그 많은 현금 빵빵한 커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게이들을 타겟으로 내놓은 상품들이 참 많다. 그들을 위한 마케팅도 있다. 그러나 못버는 여자 둘이서 있는 레즈비언 커플은 최악의 커플이라 한다. 하핫. 물론 난 여기에 안티를 건다. 사실 남자 혼자 벌고 애 낳고 여자는 집안일만 하는 이성애 커플보다는 레즈비언 커플이 훨 낫다고. 이것은 비단 문제 뿐만이 아니다.

—『니아까』 8호, 「레즈비언은 부르조아만 있는가?」, 깨트펑, 1998

왕따 니아까. 사실 예전부터 ‘니아까’는 별볼일 없는 잡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있는 줄 아는 줄 모르는 우리끼리만 아는 잡지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왕따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리고 레즈대중잡지가 되겠다는 야무진 목표를 꾸겨버렸다. 무신 대중잡지냐? 웃기지마라. 대중은 니아까를 원하지 않았다. 게을러터진 년들이 꿈지럭대고있는 니아까는 이제 더 이상 레즈의 소리통이 아니었다. 우리만 소리통이네 어쩌네 떠들어댄거였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건데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행위들은 어찌보면 소수를 위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니아까』 10호, 「편집장의 수다」, 깨트펑, 연도미상

언더그라운드 잡지의 고충, 달이면 달마다 번듯하게 잡지를 내고싶은 맘 굴뚝같으나 그러지 못할 때 찢어지는 가심⋯ 피멍울로 얼루진가심⋯ 하악하악~ 내 참. 니아까는 매달 변하는거 같군요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지요 물론.. 아흐흑. 네. 니아까는 12월호를 중단으로 다시 변신을 꾀하고 있답니다. 격월간으로 발행을 하게 되면서 3월달에 격월간 니아까가 나오게 되는거죠. 그 사이 니아까마니아분들이 심심하실까봐 니아까 새끼버젼 〈까만봉다리〉를 꽁짜로 마구마구 뿌려드립니다.

—『니아까』 새끼버전, 「까만봉다리 제1호」, 1998

어떤 레즈비언들은 다이크 특공대를 꾸려 약한 게이 몇 대 때려주면 싸움이 간단하게 끝날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마존’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고립되고 반사되고 지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게이들이 울부짖던 성적 다원주의, 민주주의를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배려해달라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렵더라도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알지?

—『또다른 세상』 2호, 「게이에서 남성으로 여성에서 레즈비언으로」, 정혜등, 1996

최소한의 합의로써 ‘여성사랑하는 여성’이라는 레즈비언의 정의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비판적으로 논쟁되어지고 재구성되고 협상되며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의 규범적인 당위는 분명 존재한다. “우리의 언어로써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고 스스로 이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세상』 2호, 「이성애제도와 레즈비언」, 김지혜, 1996

레스보스! 이제 서울에 첫발을 내딛은 첫 레즈비언 카페.. 그것은 레즈비언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출발을 의미한다. 이제 한국에도 레즈비언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장이 생겼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이벤트를 열겠다는 레스보스! 우리가 그 미래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또다른 세상』 2호, 「레스보스, 레즈비언문화공간 레스보스를 찾아가다」, 강모선, 1996

또다른 세상. 봄호⋯ 봄이 다 간 다음에 보는 잡지. 겨울도 넘겨뛰는,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초월하지!

—『또다른 세상』 4호, 뒤표지, 1997

좀 돌리지 말고 물어봤어야 했다. 레즈비언들이 페미니스트들에게 너희는 남자랑 싸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적과의 동침을 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 했고, 페미니스트들은 레즈비언들에게 한 남자도 바꾸지 못하면서 어떻게 너희들의 사랑이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 했다.

—『또다른 세상』 5호, 「다이크소녀, 페미니즘을 만나다」, 1997

동성애 공포증, 이성애 주의, 인종차별, 여성차별, 가부장제, 순종, 강제된 이성애, 성차별주의, 문화적 식민지, 겁, 편견, 정형화, 고정된 성 역할, 침묵, 지움, 미움, 불신, 나이주의, 마녀사냥, 사회적 억압, 자본주의. 이 세상은 우리가 만들어 왔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 역시 우리가 만들어 나갈 것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또다른 세상』 7호, 뒤표지, 1999

단행본 기획 제작 보류 지난 해 1월 출판사 등록을 한 [또다른 세상]에서는 단행본 기획을 잠시 보류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을 이끌어졌지만 제작비 마련 등의 여러 사정으로 작업을 중단, 유보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튼튼한 단행본 기획으로 만나뵙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또다른 세상]의 많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끼리끼리이야기』 9호, 「단행본 보류」, 2000

꼬랭지 : 진짜로 가게문 닫고 퍼레이드에 참가해주신 레스보스 사장님께 정말로 정말로 감사드린다. 정말 멋졌다!

—『끼리끼리이야기』 17호, 2001

12월 16일에는 끼리끼리후원하는 유일한 타단체인 밴디트의 송년회가 열렸습니다. 끼리끼리에서 준비한 예쁜 뱃지를 감사의 마음함께 전달하였습니다.

—『끼리끼리이야기』 13호, 「끼리소식/와우!, 끼리에 이런 일이~」, 2001

한국에도 레즈비언이 있어요?’ 8월 9일 ALN(Asian Lesbian Network) conference가 열리는 대만에 도착했을 때 각국에서 온 레즈비언들이 한국에서 왔다는 나를 보고 처음으로 했던 말이다. 이럴 수가. 그러나 사실 그런 의문과 놀람도 무리는 아니다. 그만큼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들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었고 자신을 알리는 목소리 또한 없었으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레즈비언이 무엇인지, 동성애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아마 많을 것이다.

—『끼리끼리소식지』 1995년 11월호, 「​​우리의 힘, ALN참가기」, 전해성, 1995

다이크, 격주간 신문으로 동성애자 인권연대 기관지 Dyke는 98년 3월 15일에 창간되어 격월간 발행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2호 이후 신문을 발간하지 못하였고 이를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며, 98년 11월부터 매월 두 번의 발간을 목표로 3호를 발간하였다. 기존의 다이크와는 외양에서 차이가 있으나, 알찬 기사를 약속드린다.

—『다이크』 3호, 「다이크, 격주간 신문으로」, 1998

잘 키운 동성애자 하나 열 이성애자 안 부럽다!

—『다이크』 3호, 「동인련 내부광고」, 1998

친구사이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에 있습니다. 조금이나마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친구사이1997년 12월호

뚝섬역 1번 출구로 나오셔서 가스충전소를 지나오시면 횡단보도가 나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신 후 스마일 식품점 골목으로 들어오시면 부동산 간판이 보입니다. 간판이 있는 건물 지하가 바로 친구사이 사무실입니다.

—『친구사이1997년 12월호

본 지는 심의규정을 준수하지 않습니다.

—『친구사이1998년 8월호

보도 위를 혼자 걷는 남자가 낯설게 보일 만큼, 연인끼리의 팔짱끼기와 마주잡은 손들이 주저없이 자연스러운 그린위치빌리지. 내내 질투로 이글거리던 한국 토종 게이의 토라진 눈가에도 슬며시, 봄날의 기운처럼 웃음이 번져나오게 하는 게이들의 활기찬 오후 산책⋯. 그래도 그들은 1970년대 바로 그곳에서, 그리고 99년 호모포비아에게 희생당한 어느 게이의 장례식에도 두 주먹 불끈 쥔 채 자유를 위해 싸워야 했다. 그들의 자유자유를 위한 그들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는 너무도 뻔한 이치를, 눈감을 수 없이 자명한 그 깨달음을 그린위치 빌리지의 산책길에서 배운다.

—『친구사이1999년 5월호, 「이희일의 뉴욕기행」, 이송희일, 1999

친구사이 후원업소를 모집합니다. 친구사이동성애자 여러분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가 있어야 존속할 수 있는 인권운동 단체입니다. 업소 여러분들의 성원은, 우리 동성애자들의 떳떳한 과 자긍심을 길러내는데 커다란 힘이 될 것입니다.

—『친구사이1999년 5월호, 「친구사이후원업소를 모집합니다」, 1999

날씬한 몸매와 해맑은 웃음을 가진 나우누리 동성애자 모임 ‘레인보우’의 모임지기 ‘참된세상’님은 세 모임모임지기 중 가장 나이가 젊었다. 온라인상이었지만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셨고 추가 인터뷰까지 요청할 정도로 적극적이셨던 모임지기의 모습에 가장 늦게 출발하고서도 결코 다른 모임에 뒤지지 않는 활동력을 갖춘 레인보우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천리안의 동성애자 인권모임모임지기인 ‘길벗’님은 비교적 오랫동안 천리안 모임방에서 벌인 활발한 활동과 수려한 글솜씨를 인정받아 최근 80명이 넘는 인원이 모인 정기모임에서 3대 대표 시삽으로 뽑힌 분이다. 차분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일을 진행시켜 급기야는 큰 사고(?)를 치고야 마는 추진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하이텔 모임지기인 오현주님은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분답게 오프라인상에서의 인터뷰를 먼저 제안해왔다. 오현주님과의 만남은 후텁지근한 날의 불쾌함을 씻어줄 시원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소낙비와도 같았다.

—『친구사이』 12호, 「세가지색깔, 하나의 목소리_통신3사 시삽을 만나서」, 연도미상

1997년, 한국 동성애 인권운동역사가 바뀐다. 친구사이사무실을 이전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친구사이의 숙원사업이던 사무실 이전이 드디어 여러 단체와 고마우신 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지원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한국 남성 동성애자인권 신장을 위하여 더욱 전진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도움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친구사이』 14호, 뒤표지, 1997

한: 오늘의 집회는 내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 훈 : 쌍용자동차 노조의 노동자가 ‘동성애자 연대투쟁, 노동악법 철폐하자’는 구호를 외쳐주었다. 정말 용기가 솟았다. 석 : 극장에서 소식지 돌릴 때보다 반응이 좋았다. 전경 방패에 붙어있던 핑크 트라이앵글이 인상적이었다. 순 : 집회는 난생처음이고, 레즈비언으로서 나와야 한다는 사명감에 나왔다. 너무 무서웠지만 앞으로도 계속 참여하고 싶다. 안 : 우리만 나설 게 아니라 동성애자 내부로 확산시켜야 할 것 같다. 순 : 투쟁은 축제이다. 신나게 웃고 떠들며 투쟁한 것이 자랑스럽다.

—『친구사이』 14호, 「무지개 퍼레이드 후기」, 1997

동성애 문제’만 가지고 ‘인권! 인권!’ 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이고 편협한 문제 접근이란 생각이 든다. 동성애 사회가 모든 차별받는 집단들의 문제 해결에 같이 뛰어들어야 ‘동성애 인권문제’도, ‘진보적 노선을 걷고 싶지만 왠지 모르게 이성애 관점만큼은 포기하질 못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같은 인권 문제로 비로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동성애자들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사이2000년 6월호, 「동성애자들이 ‘안티미스코리아’에 열광해야만 하는 이유」, 정기상, 2000

故 육우당 유서에서. 이 세상은 아비규환인 것 같습니다. ,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 이 여섯 가지가 제 유일한 친구입니다. 그래서 육우당(六友堂)이죠. 후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의문입니다.

—『LGBT PAPER2003년 6-7월호, 앞표지, 2003

동성애자 인권연대를 알게 된 건 친구의 권유에서였다. 이미 동인련과 친분이 있던 친구는 급하게 포스터를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했고, 동성애자 인권연대란 단체가 있다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나는 조심스레 승낙을 하고 캠프 포스터를 만들면서 동성애자 인권연대와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 지금 동인련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의 작은 관심을 필요로 하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는가⋯

—『LGBT PAPER2003년 10-11월호, 「연재, 인권운동과 나」, 강태성, 2003

성소수자를 한 번에 구별해낼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한 그들은 더욱 더 불안해져서 조금이라도 규범에서 벗어날라치면 의심을 하고 추궁한다. “왜 결혼안하니?” “왜 화장을 안하고 치마를 안입니?” “왜 머리를 기르지 않니?” ⋯ 남성중심적, 이성애중심적 사회에서 ‘아버지’의 요구대로 살지 않는 여성들은 훈계와 교정의 대상이 된다. 이런 와중에 만약 그녀가 성소수자였다면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 사회여성성소수자가 ‘남자 맛을 못봐서’ 그렇게 되었다면서 그녀에게 사기, 협박, (성)폭력 등의 극단적인 ‘남자 맛’을 보인다. 그리고 사회는 이러한 폭력을 모른척 함으로써 용인한다.

—『끼리끼리이야기』 21호, 「우린, ‘아직’ 살아있어요」, 김나인, 2003

에 죽고 기갈에 살자.

—『중대이반신문창간호, 앞표지, 2005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꿈 꿀 수 있잖아요.

—『중대이반신문창간호, 앞표지, 2005

주변 장애인 분들에게 커밍아웃한 적은 없으신가요? 커밍아웃을 한 친구가 있었는데 못 받아들이더라고. 비장애인들은 대부분 “이해는 하지만 저는 그쪽이 아니에요”라고 쉽게 얘기하고 헤어질 수 있지만 장애인들은 안 그래. 좁은 활동공간 속에서 계속 만나야만 하니까. 그 사람커밍아웃 이후론 계속 날 거부하고 딴지를 걸었어.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 좀 괜찮아졌지만, 나름대로 실험한다고 한건데 위기가 되어버렸지. 그 이후에는 커밍아웃을 안 했어⋯ 다시는 하고 싶지가 않더라고⋯

—『중대이반신문창간호, 「잔디형은 중증장애를 지닌 동성애자입니다」, 신이, 2005

현재 서울지역 대학 동성애자 인권 모임은 저희 모임과 서울대 〈마음001〉, 연대 〈컴투게더〉, 이렇게 세 모임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겠지요. 격주의 연합모임을 통해 타대생들과의 만남의 자리도 마련됩니다. 어두운 혼자만의 밀실에서 고민하느니 과감하게 맞부딪혀보는 것이 지혜로운 인 것 같습니다. 저희는 동성애자 여러분을 어제나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창간호,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람’에 대해 말하라면..」, 1996

커밍아웃엔 대체로 다음의 3단계 정도가 있는 것 같다. (⋯) 3단계는 소수라는 성정체성을 세계를 바라보는 중심틀로 사고하게 되는 경우인데, 예를들면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반이라고 합니다.” 등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 3단계부터 자의든 타의든 그, 혹은 그녀는 공포의 변태 투사가 되는 것이다.

—『마음006』, 「커밍아웃 스토리」, 1998

25세는 어린 나이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자가 25세 이상 될 때까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특히 자신성정체성을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또한 부모님의 뜻을 어기면서 결혼을 거부하고 있기는 힘들다고 본다. 그것은 강한 “자기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부모들은 독신여성(결혼하지 않은)의 외로운 노후에 대해 경고하곤 한다. 또 그것으로 자녀에게 결혼을 강요하곤 한다.

—『밴댕이들의 소식2002년 3월호, 「밴디트와 나」, 2002

올 5월에도 예외없이 동경 국제 레즈비언 게이 영화제가 열렸다. 주의하시랏! 그 예외 없다는 말을. 우리 서울퀴어영화제의 각별한 ‘예외적인’ 사정에 견준다면, 그들은 더없이 행복하다. 이제 연륜이 찰대로 찬 동경 국제 영화제의 소식을 예지감치 접했지만 서울퀴어영화제는 참가할 수 없었다. 이미 석달째 사무실 임대료가 밀린 처지에 먼발치에서 응원하는 수밖에.

—『퀴어씨네뉴스』 2호, 「동경국제레즈비언게이 영화제에서 알려온 연대의 메시지」, 1998

#힘망찬 소식 하나.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각자의 목소리를 담았던 동성애자 단체들이 드디어 연대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남성 동성애자 인권모임인 ‘친구사이’, 여성 동성애자 모임끼리끼리’, 그리고 새로운 동성애 문화를 열어가는 ‘버디’ 등 전국 27개 동성애 단체들이 5월 31일 세종대에 모여 ‘한국 동성애자 협의회’ (가칭)을 결성하였습니다. 아직 정확한 활동과 모임의 명칭이 결정되지 않았지만 전국동성애자단체들의 대표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문제점과 동성애자 인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박수를⋯

—『퀴어씨네뉴스』 2호, 「HOMO OFFICE」, 1998

서울퀴어영화제가 소동을 일으킵니다. 저희는 이성애 문화의 틈새를 해집고 들어가는 퀴어문화혁명의 게릴라들을 찾습니다. 서울퀴어영화제는 “레즈비언, 게이, 성 전환자로서 혹은 성의 무법자로서 자신을 옹호하고 표현하는 모든 문화적 작업”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퀴어들이 탁월하고 근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조악하고 무디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을 위한 문화 예술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비로소 더듬거리며 비틀거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우리의 모든 언어들을 한자리에 모으고자 합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누락된 퀴어들의 언어의 권리, 그리고 그 미래”야말로 서울퀴어영화제제의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팩토리뉴스창간호, 「퀴어문화혁명의 게릴라들을 찾습니다」, 1997

제 1회 서울퀴어영화제 사무국은 1997년 5월 ‘끼리끼리’ 운영위원회에 참가하여 서울퀴어영화제의 그간의 준비사항과 의미, 취지 등을 자세히 알리고 여성 동성애자 모임인 ‘끼리끼리’와 함께 제1회 서울퀴어영화제를 만들어 가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전해성 회장님 이하 끼리끼리 운영진이 참가한 운영위원회에서는 저희 서울퀴어영화제 사무국의 이러한 의지를 받아들이고 서울퀴어영화제에 ‘끼리끼리’가 가능한 모든 도움과 동시에 함께 연대하기로 했습니다.

—『팩토리뉴스창간호, 「끼리끼리함께」, 1997

95년 초였을 것이다. 우연히 알게 된 하이텔 중앙 대화실의 동성애자 대화방⋯ 난 그곳을 통해 소외 데뷔(?)라는 것을 하게 됐다. 처음 그곳을 드나들 때는 어찌나 두려웠던지⋯ ‘동성애자 대화방에 들어가 있는 것을 혹시 아는 사람이 보면 어떡하나?’하는 걱정부터 시작해서, 한번 만나자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난 후다닥 대화방을 도망쳐 나와야 했고, 그들만의 은어를 들을 때마다 난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을 헤매야 했다. 그렇듯 나의 시작은 두려움과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그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니⋯

—『또하나의 사랑』 10호, 「뜨겁고 강렬한 또하나의 사랑을 꿈꾸며⋯」, 김현구, 1998

오늘 하루 아르바이트루 일당 5마넌에 일본고딩 가이드를 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을 6명을 데리구 다녔었는데⋯ 명동에서 그 아이들이 나보고 “레즈⋯? 레즈⋯? 아나타 레즈??이러는 것이다. 흠짓⋯ 아니 이것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하구 무지 놀랐다. 티나게 행동한 거 하나두 없었구만⋯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을 하냐구 했드만⋯ 내가 같이 알바하던 여자애하구 팔짱을 끼구 걸어다녔기 땜에 레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선 친구들끼리 이러구 다니는 거 보통이라구, 짧은 일본어루 열심히 설명해 줬다.

—『또하나의 사랑』 10호, 「일본 아이들이 나보고 레즈냐구⋯」, 1998

또사모 엠티때 모래시계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가려진 얼굴 속에서 우리나라 동성애자들의 인권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얼굴의 모자이크를 지울 수 있는날,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노력할 것입니다.

—『또하나의 사랑』 8호, 「표지설명」, 1997

예전부터 종로 쪽에서부터 쓰이는 속어로 남성 역의 사람들 땟자, 여성 역의 사람을 맞자, 그리고 양 역할이 가능한 사람을 전차라 합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게이들에겐 그리 특별한 구분이 없고 이 용어는 잘 쓰이지 않습니다.

—『또하나의 사랑』 8호, 「게이가 알고싶은 레즈비언, 레즈비언이 알고 싶은 게이」, 1997

또사모에서 게이들을 알게되면서 느낀 것이 게이들이 보통의 남자들보다 훨씬 낫다는 점이었다. 일반 남자들같은 남성권위주의적인 사고가 없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고 즐긴다기 보다는 자포자기적 인생을 산다거나⋯ 성욕을 콘트롤 할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또하나의 사랑』 8호, 「게이가 알고싶은 레즈비언, 레즈비언이 알고싶은 게이」, 1997

또하나의 사랑』은 또하나의 문화를 패러디한 명칭이다. ‘열린마음’이라는 명칭이 사용 불가능하게 되자 초대 대표시삽 bake6608님은 모임 명칭에 대해 의견을 물어보았고 나는 『또하나의 문화』에서 힌트를 얻어 ‘또하나의 사랑’이라는 명칭을 제시했다. 그것은 단순히 명칭의 패러디만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 하나의 문화』가 가진 정신, 철학, 열정, 실험정신, 대안문화의 제시 등에 대한 패러디를 의미한 것이었다.

—『또하나의 사랑』 7호, Pureluv, 1997

트랜스젠더 논쟁에 난데없이 끼어든 메텔! 이삼십 대의 어린 시절을 꿈과 환상으로 채워주었을 TV시리즈 은하철도 999의 여주인공인 메텔은 과연 정체가 무엇이었을까? 그녀에게서 철이가 느끼는 감정은 과녕 모성애였을까? 트랜스젠더여성성을 표현한 인물일수도 있다는 의견이 게시판에 떠올랐다.

—『또하나의 사랑』 7호, 「게시판 이모저모」, 1997

두 마리의 커다란 공룡 앞에서 돌 몇 개를 들고 싸우는 기분이다. 한 마리의 공룡은 애써 우리를 외면한다. 그 공룡은 냉소를 던지고, 침묵으로 우리를 짓누른다. 돌을 던지며 시선을 끄는 행동을 해도 애써 회피한다. “우리가 여기에 있소!”라고 외쳐도 그 공룡에겐 우리가 안 보이나 보다. 대신에 그 커다란 발로 우리가 던진 돌을 걷어찬다.

—『또하나의 사랑』 4호, 「프롤로그」, Pureluv, 1996

홍콩에 가보니까 gay bar가 많더라고요, 홍콩만 해도 굉장히 자유로운데⋯!!!~~~ 나같이 김종서처럼 머리 긴 남자가 지나가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이 거리에 하나도 없고⋯

—『열린마음』 2호, 「벽을 허물고」, 1996

저는 이성애자입니다. 하지만 동성애를 비난하거나 멸시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흐음⋯ 저 나름대로 동성애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저런 자료를 가지고 공부해오길 이제 석 달이 되네요. 그렇다고 무슨 심리학이나 사회학을 전공하는 것은 아니고요.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건지나 알고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런저런 책들을 그냥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동성애 소식지를 발간하신다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드린 이유는 그 소식지를 저도 받아볼 수가 있을까해서 입니다.

—『열린마음』 2호, 「벽을 허물고」, 1996

나는 ‘’를 무건적으로 폄하하는 이들이 싫습니다. 게이로서의 재미도 모르고 사는 그들이 불쌍해요. 그래서 저는 ‘남색가’라고 비웃곤 합니다. 사실 그게 나쁜 의미는 아니예요. 단지 비웃어주는 만큼 비웃어주는 거예요. 그들와 우리는 다르다고 하니, 그렇게 불러줘야지 어쩌겠어요. 그래도 인기가 많은 건 그들이에요.

—『』 7호, 「보갈인가 남색가인가」, 이대희, 2009

난 무척이나 소심하다. 타임라인에는 온통 한진 이야기로 채워졌고 내내 트위터를 보기만 하다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퀴어버스를 따라 나섰다. 부산이 고향이라는 마레연 주민의 노래, 지보이스의 노래와 율동을 따라하며 45명을 꽉 채운 퀴어버스는 부산을 향했다.

—『레인보우링』 season3 3호, 「부산으로 간 퀴어버스」, 칼로, 2001

‘기혼’이라는 단어 안에 ‘남편’과 ‘아이’가 겹쳐 보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연애는 모두 불륜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사회적으로 말하기에는 불륜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성정체성은 유동적인 것이라 평생 이성애자로 살아오다 결혼한 뒤에 레즈비언임을 깨달았을 수도 있고, 바이인 줄 알았다가 레즈비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도 있다.

—『레인보우링』 season3 3호, 「기혼이반 커플」, 2001

이성애 사회에서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여성남성의 옵션, 그 어디도 속하고 싶지 않은 나는 점점 옭아매어오는 상황에 몸 둘 바를 모르고 또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비록 ‘부치’에 대해서도 성별의 잣대가 드리워지기도 하고 몇 가지의 규범들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가장 적은 물음표가 붙는 카테고리이자 나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이름인 ‘부치’.

—『QueerFly』 6호, 「부치의 탄생」, 2000년대

나의 경우엔 커밍아웃에 그리 거창한 목적이 있지 않다. 그저, 주위의 사람들과 나의 더 많은 것을 공유했으면, 그래서 그들이 나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아줬으면 하는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랄까.

—『QueerFly』 6호, 「커밍아웃」, 2000년대

간행물의 제목은 〈〉(e의 2승)입니다. 경상도 지역 화자들은 2와 e를 구분하여 ‘다른’ 음으로 발음합니다. 제목 〈e2〉는, 이성애의 헤게모니 속에서 ‘다른’ 성정체성, 성적지향을 가진 부산 지역의 ‘이쪽’, ‘이반’의 이야기를 담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 「여는 글」, 닭살튀김, 2015

SNS는 즉각적인 사람들의 반응과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서비스이지만, 정보의 중요성에 상관없이 시간이 지나면 밀려서 사라지고 마는 글의 휘발성은 치명적인 단점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그러한 SNS의 한계를 인쇄매체로 극복해보고자 했다. 시간에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동아리 회원들의 글을 간행물에 갈무리해 보는 것이다. 쉽게 잊혀지지 않도록, 한 명의 독자라도 더 볼 수 있도록.

—『』, 「SNS 갈무리」, 닭살튀김, 2015

김괜저, 고성광, 권태연, 김현, 김희준, 닭살튀김, Dann, Lutz, Ross Watson, 맛난다치킨, MECO, 박시영, 박창욱, 보비, 소준문, 송길호, A-Jo, 오인환, Elmgreen & Dragset, 왁킹, 이민규, 이우인, 이재훈, 장은영, 전상진, 전진우, 정환, 정효락, 조현, 탁영준, 터울, 한가람, 한희, 함민기, Harry Jun

—『뒤로창간호, 뒤표지, 2016

90년대에 영페미니즘 운동을 할 때 이미 트랜스젠더들이 같이 활동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이 친구들을 대해야 할지 논쟁이 계속 있었다고 들었어요. 여성영화여성 전용축제에 트랜스가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퀴어문화축제에서 여성 전용파티를 따로 만들었을 때 트랜스가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논쟁이 계속 있었다고 들었고요.

—『』 특별판 ‘쓰까페미’, 「루인에게로 달려가기」, 2017

2011년에 한 목사가 “한국동성애 청정국이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상한 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라는 식의 말을 했을 때, 아카이브에 가면 70년대, 80년대, 90년대 이미 이렇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거죠.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효과가 있는 거예요.

—『』 특별판 ‘쓰까페미’, 「루인에게로 달려가기」, 2017

그들은 마치 메갈이 성소수자나 성 노동자 혐오집단인 양, 부유한 게이가 게토화된 인종차별이나 가난한 이성애자의 원흉인 양 말하며 계급젠더섹슈얼리티라는 복합적인 제도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메갈이나 게이 커뮤니티에 전가한다. 또한 이들은 여성이나 동성애자경험하는 억압이 서로 교차한다는 사실은 은폐한다.

퀴어인문잡지 『삐라』 3호 ‘길티 플레저’, 「내가 남혐 걸린 게이다 이기야!: ‘혐오세력 메갈 vs. 한남충 게이’라는 혐오의 구도를 넘어서」, 유정민석, 2016

총 223분의 텀블벅 크라우드 펀딩 참여를 통해 제작되었습니다.

—『네온밀크창간호, 2017

동성애자 관련 기사를 보면 악플이 엄청 많은데 혼자였다면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텐데, 그런 걸 친구들이나 같은 게이끼리는 웃으면서 넘길 수 있으니까요. 요즘은 공연을 해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보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뭔가를 찾게 돼요. 뒤집어지게 재미있는 공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게이 인권도움이 되는 게 뭘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걸 고민하게 돼요.

—『플래그페이퍼창간호, 「앤초비」, 2017

사람들이 놀러 다니는 것도 좋지만, 인권 활동이라든지 이런 거에도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면 좋을 것 같아요. 대만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되었을 때 다 같이 으쌰으쌰 하는 모습을 보며 감명 깊었는데 우리는 하는 사람만 하고 안 하는 사람은 계속 안 하는 것 같아서⋯ 지금도 종로가 우리들의 큰집 같은 공간인데 점점 없어지도 있으니까 뭐가 되었든 다 같이 힘을 모으거나 하는 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플래그페이퍼창간호, 「보리」, 2018

여기에도 연대나 접점에 대해 나와있잖아요. 늘 내가 이 얘기 나오면 하는 말인데 우리가 LGBTQ라고 좋게 얘기는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커뮤니티라는 개념이 전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퀴어끼리도 결속력이 되게 떨어지고, 서로 서포트하는 것도 잘 없어요. 여성 그룹에서는 남성 그룹을 비난하고 경계를 하는 경우가 많고, 남성 그룹에서는 좀 부적절한 표현일 수 있지만, 내가 느끼는 대로 말하면⋯ 남성 단체들은 여성 단체들을 신경도 안 쓰고 안중에도 없어요. 그래서 서로 교류가 없는 것 같고, 거리 두면서 별개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늘 말하는 게 LGBTQ에서 G(Gay) 뺐으면 좋겠다고 게이가 존나 이기적이라고⋯ (웃음) 그런 얘기를 해요.

—『보릿자루 산책하기창간호, 「J」, 2022

그런데 어플 좀 싫어요. 게이 커뮤니티의 피라미드 구조를 심하게 만들었잖아요. 외모 지상주의가 훨씬 심해졌죠. 옛날에는 외모가 좀 별로여도 “그래도 세 번은 봐야지, 또 다른 매력이 있을 수도 있어.” 이랬는데, 지금은 사진 교환하고 아닌 것 같으면 안 만나. 왜냐, 내가 또 만날 사람이 줄 서 있거든. 어플에 프로필 사진 수백 개가 쫙 리스트로 보이잖아요.

—『보릿자루 산책하기창간호, 「D」, 2022

경주 시내에 있는 목욕탕이었는데⋯ 거기를 어떻게 가게 됐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여튼 목욕탕을 갔는데 ‘수면방’이라는 표시가 있었고, 저는 그게 궁금해서 들어가 봤어요. 그냥 누워 있었는데 어떤 접촉이 있었어요. 여러 번 있었어요. 한번 알게 되고 난 이후에는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사실 집에서 씻어도 되는데⋯.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적응된 이후부터는 성욕 해소를 위해서 간 것 같아요. 그것도 다 고등학교 때예요.

—『보릿자루 산책하기창간호, 「W」, 2022

24회관은 (⋯) 업장이 엄청 크니까 섹스하는 방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시설이 있는 일종의 실내 놀이시설 같은 분위기였어요. 거기서 나눠주는 타월로 아래만 가리고 바에서 주문해서 마실 수 있고 간단한 식사 같은 것도 팔고, 목욕탕도 있고 옥상에 올라가면 운동할 수 있는 공간도 있고요. 정말 운동이라기보다는 롤플레잉 섹스하는 공간? 한국 찜방보단 전반적으로 좀 더 밝고 깨끗한 느낌이에요.

—『보릿자루 산책하기창간호, 「H」, 2022

그러니까 저는 페미니스트거든요. 그리고 게이는 당연히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단톡방이나 다른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은 안 그런 친구들이 많은 거예요. 자기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 완전 무관심하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나의 권리나 인권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지 잘 이해를 못 하고요. (⋯) 그리고 동갑 단톡방이나 같은 직종 단톡방 사람들끼리 만나도 우리는 같은 인생을 사는 동료들이라는 느낌보다는, 만 마시고 플러팅의 목적만 있고⋯ 이런 것들이 부정적으로 느껴질 때 지보이스를 나와봤어요.

—『보릿자루 산책하기창간호, 「Y」,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