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022...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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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발행한 『초동회 소식지』 이후, 한국의 퀴어(비연속/연속)간행물의 문장을 수집하고 연결하는 공간입니다. 발견한 문장을 보내주세요.

솔직히 창간호 모델로 기용하면서 내심 망설였다. 소위 역사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의 첫 호에 양성애자를 쓴다는 것에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그러나 그녀가 양성애자라고 해서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역시 어려웠다. 그녀가 나와 달리 남자에게도 연정을 느낀다지만 나와 똑같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그녀의 양성애 성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레즈비언이라는 테두리에서 제외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버디』 12호, 「내가 바이라는데 왜 놀라지?」, 한채윤, 1999

11월 23일,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정기모임이 있는 날.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범일동에 위치한 텔레폰이라는 곳의 문을 열었지만, 막상 나를 맞아주는 건 썰렁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룰루랄라~~” 히죽거리며 “송지나의 취재파일”을 봤다. 4명의 여성들이 얼굴을 공개하고 자신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그들이 TV라는 파급효과가 큰 매체에 COMING OUT(커밍아웃-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용기가 필요했을까? 방송이 나간 후 겪었을 부당한 대우와 주위의 시선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한두 명씩 사람들이 들어섰다.

—『같은마음』 7호, 「첫번째 만남」, 낮은 목소리, 1998

난 아무것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씩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날 위로하려 들거나 감싸 안으려 들때까지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 곁에서 조용히 두 손으로 감긴 내 두 눈을 쓰다듬어올려주는 손이 있습니다. 한울타리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의 손길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작은 바램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울타리』 6호, 뒤표지, 1999

이반이어서 외롭고 우울하니까 나는 많은 일을 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을 폭넓게 알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보이지 않게 사랑함으로 아픈 만큼 사람을 이해하고, 상처를 어루만져 줄줄 알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보도블럭 사이에 핀 꽃을 발로 차지 않고, 한참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아픔과 슬픔만큼 기쁨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가마타는 즐거움 뒤에 가마 매는 괴로움도 있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사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오래오래 보게되면 된다는 믿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하고, 사랑의 힘을 믿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인간적이란 말”의 뜻을 알게 해 주어서. 이반이어서, 이반이어서..

—『너와나창간호, 「⚨.이반이라서⋯..」, 하섭님, 1999

최소한의 합의로써 ‘여성사랑하는 여성’이라는 레즈비언의 정의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비판적으로 논쟁되어지고 재구성되고 협상되며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의 규범적인 당위는 분명 존재한다. “우리의 언어로써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고 스스로 이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세상』 2호, 「이성애제도와 레즈비언」, 김지혜, 1996

좀 돌리지 말고 물어봤어야 했다. 레즈비언들이 페미니스트들에게 너희는 남자랑 싸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적과의 동침을 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 했고, 페미니스트들은 레즈비언들에게 한 남자도 바꾸지 못하면서 어떻게 너희들의 사랑이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 했다.

—『또다른 세상』 5호, 「다이크소녀, 페미니즘을 만나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