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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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발행한 『초동회 소식지』 이후, 한국의 퀴어(비연속/연속)간행물의 문장을 수집하고 연결하는 공간입니다. 발견한 문장을 보내주세요.

전국적으로 153이라는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른 지역 153에도 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광주에 사는 누구누구인데요, 대전에도 많이 계시군요” 하면서 메시지를 남기는 거죠. 그렇게 교류시작되었고 각 지역 대표들끼리 모여서 “우리 전국 MT도 하게 됐죠. 그때가 아마 1997년 12월 달쯤이었을 거예요”

—『버디』 24호, 「빛동인광주 153전화사서함 모임역사」, 〈버디〉편집위원, 2003

2000년 8월 26일 비오는 대학로를 가로질러 200여 명의 이반들이 짤막한 거리를 행진할 때도, 그 이듬해 2001년 9월 홍대정문에서 출발한 소규모의 행렬이 홍대 정문 앞을 벗어나지 못한 체 곧바로 유턴을 해야하던 순간에도, 그리고 또 그 이듬해 2002년 월드컵이 막 팡파르를 울리기 시작하던 그때 6월 8일, 이태원에서 제법 퍼레이드를 모양새를 갖추며 행진할 때도 세상 사람들은 놀라고야 말았을 것이다. “아니 우리나라에도 저런 동성연애자들이 행진을 하다니⋯”

—『보릿자루』 42호, 「조선의 호모종로를 주름잡던 날」, 김재원, 2003

대경회’가 1년의 역사를 갖게 되고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은 한국 동성애 역사 발전에 큰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 중심의 동성애 문화에 목말라했던 지방동성애자들도 이제는 보수적인 지방색을 이기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말이죠. ‘대경회’를 선두로 다른 많은 지방에서도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시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을 시작한 ‘대경회’회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더욱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레즈비언들도 ‘대경회’를 위해 큰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고요. 저희 ‘끼리끼리’와도 긴밀한 교류가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한국 여성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끼리끼리’회장 전해성, 1997

동성애자 인권연대를 알게 된 건 친구의 권유에서였다. 이미 동인련과 친분이 있던 친구는 급하게 포스터를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고 연락을 했고, 동성애자 인권연대란 단체가 있다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던 나는 조심스레 승낙을 하고 캠프 포스터를 만들면서 동성애자 인권연대와의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 지금 동인련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의 작은 관심을 필요로 하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는가⋯

—『LGBT PAPER2003년 10-11월호, 「연재, 인권운동과 나」, 강태성, 2003

#힘망찬 소식 하나.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각자의 목소리를 담았던 동성애자 단체들이 드디어 연대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남성 동성애자 인권모임인 ‘친구사이’, 여성 동성애자 모임끼리끼리’, 그리고 새로운 동성애 문화를 열어가는 ‘버디’ 등 전국 27개 동성애 단체들이 5월 31일 세종대에 모여 ‘한국 동성애자 협의회’ (가칭)을 결성하였습니다. 아직 정확한 활동과 모임의 명칭이 결정되지 않았지만 전국동성애자단체들의 대표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문제점과 동성애자 인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박수를⋯

—『퀴어씨네뉴스』 2호, 「HOMO OFFICE」, 1998

서울퀴어영화제가 소동을 일으킵니다. 저희는 이성애 문화의 틈새를 해집고 들어가는 퀴어문화혁명의 게릴라들을 찾습니다. 서울퀴어영화제는 “레즈비언, 게이, 성 전환자로서 혹은 성의 무법자로서 자신을 옹호하고 표현하는 모든 문화적 작업”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퀴어들이 탁월하고 근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조악하고 무디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을 위한 문화 예술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비로소 더듬거리며 비틀거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우리의 모든 언어들을 한자리에 모으고자 합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누락된 퀴어들의 언어의 권리, 그리고 그 미래”야말로 서울퀴어영화제제의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팩토리뉴스창간호, 「퀴어문화혁명의 게릴라들을 찾습니다」, 1997

95년 초였을 것이다. 우연히 알게 된 하이텔 중앙 대화실의 동성애자 대화방⋯ 난 그곳을 통해 소외 데뷔(?)라는 것을 하게 됐다. 처음 그곳을 드나들 때는 어찌나 두려웠던지⋯ ‘동성애자 대화방에 들어가 있는 것을 혹시 아는 사람이 보면 어떡하나?’하는 걱정부터 시작해서, 한번 만나자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난 후다닥 대화방을 도망쳐 나와야 했고, 그들만의 은어를 들을 때마다 난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을 헤매야 했다. 그렇듯 나의 시작은 두려움과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그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니⋯

—『또하나의 사랑』 10호, 「뜨겁고 강렬한 또하나의 사랑을 꿈꾸며⋯」, 김현구, 1998

2011년에 한 목사가 “한국동성애 청정국이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이상한 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라는 식의 말을 했을 때, 아카이브에 가면 70년대, 80년대, 90년대 이미 이렇게 활동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거죠.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효과가 있는 거예요.

—『』 특별판 ‘쓰까페미’, 「루인에게로 달려가기」,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