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022...
레즈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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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발행한 『초동회 소식지』 이후, 한국의 퀴어(비연속/연속)간행물의 문장을 수집하고 연결하는 공간입니다. 발견한 문장을 보내주세요.

솔직히 창간호 모델로 기용하면서 내심 망설였다. 소위 역사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의 첫 호에 양성애자를 쓴다는 것에 독자들이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그러나 그녀가 양성애자라고 해서 레즈비언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역시 어려웠다. 그녀가 나와 달리 남자에게도 연정을 느낀다지만 나와 똑같이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그녀의 양성애 성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녀를 레즈비언이라는 테두리에서 제외시켜야 할 아무런 이유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버디』 12호, 「내가 바이라는데 왜 놀라지?」, 한채윤, 1999

세상 모든 것 다 없어도 좋으니 네가 내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 한 여성이 한 여성에게 절절하게 드러낸 고백 아닌가

—『버디』 24호, 「아! 눈물 나는 레즈비언 사극, 대장금」, 한채윤, 2003

안전지대는 시간과 홍보의 부족으로 쉽게 접하기 힘든 여성 영화게이, 레즈비언 영화, 서적들을 보급하기 위해 우편 발송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필요 없이 버리실 물건이나 새것으로 바꾸어 불필요해진 기재들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복사기, 팩스, VTR, 캠코더 등) 신분의 노출이 걱정되거나 용기가 없어 쉽게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안전지대는 우편사서함을 개설해 놓고 있습니다. 이성애라는 남성 중심의 다수를 위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집단과 여성의 평등한 지위 향상을 위해 우리가 벌이는 의식개혁 인권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분이라면 후원 또는 어떤 식의 참여도 우리에게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안전지대창간호, 「안전지대는」, 1997

1997년5월 21일로부터 태어난 안전지대는 이제껏 비활동적이고 음성적이던 부산, 경남지방레즈비언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꼭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여성으로 겪는 사회적인 사회적인 부당함 등을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별성정체성을 떠나 이반인(二般人)인 우리가 일반인이라고 하여 배척하지 않으며 다수인 그들 속에서 당당한 인격체로서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 자신부터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자신을 바라보아야 되지 않을까.

—『안전지대창간호, 「내는 글⋯.」, 1997

레즈비언 섬을 발견하다. 암흑 같던 어둠을 뛰쳐나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이 자신스스로가 열어가고자 방황해야 했던 수많은 날들⋯ 한국 최초 동성애 전문 잡지 버디세상에 나오면서, 어둠의 빛처럼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문을 두드린 레즈비언 모임 안전지대⋯ 새내기-신입-여러분이 많은 상담과 회원가입과 모임에 대한 문의를 해옵니다. 벅찬 감동과 반가움 이전에 빈 구석을 메워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찾아나갈 정도로의 모임의 내용과 허전함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안전지대』 9호, 「글: 회장 블랙」, 1998

대경회’가 1년의 역사를 갖게 되고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은 한국 동성애 역사 발전에 큰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울 중심의 동성애 문화에 목말라했던 지방동성애자들도 이제는 보수적인 지방색을 이기고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말이죠. ‘대경회’를 선두로 다른 많은 지방에서도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물론 시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을 시작한 ‘대경회’회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앞으로 더욱 많은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레즈비언들도 ‘대경회’를 위해 큰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고요. 저희 ‘끼리끼리’와도 긴밀한 교류가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한국 여성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끼리끼리’회장 전해성, 1997

세상살기가 점점 힘들어져서 레즈비언들의 걱정되는 시기입니다. 아무래도 여자사회적으로 혼자 살기 힘드니까요. 더더군다나 레즈라면? 하지만⋯ 여태껏 독신녀는 있어왔고 어떻게든 살아있듯 우리도 잘먹고 잘살겁니다. 더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땡땡하게 뭉쳐있으니까요. whynot 회지 탄생을 축하하며⋯ 회지는 한 권 보내주시는거지요?

—『와이낫창간호, 니아까 편집장, 1998

저번에 서울퀴어영화제에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레즈비언 영화를 찍을 때 가장 어울리는 배우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 난 그 질문에 대해 강!부!자!라고 외쳤다. 장난이 아니라 나의 불만은 왜 레즈비언으로 나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쭉쭉 빠지고 이쁘고 멋진 여자들뿐이냐는 것이다. (⋯) 레즈비언 중에 변정수나 진희경같은 스타일의 여성은 거의 없다는 것. 그걸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다.

—『니아까』 4호, 1997

게이들에게는 사우나탕도 있고 극장도 있다. 게이바레즈비언바의 수배이다. 게이 커플은 최상의 커플이라 한다. 이 사회남자들이 훨 을 많이 버는 사회이고 애도 없는 게이 커플은 그 많은 현금 빵빵한 커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게이들을 타겟으로 내놓은 상품들이 참 많다. 그들을 위한 마케팅도 있다. 그러나 못버는 여자 둘이서 있는 레즈비언 커플은 최악의 커플이라 한다. 하핫. 물론 난 여기에 안티를 건다. 사실 남자 혼자 벌고 애 낳고 여자는 집안일만 하는 이성애 커플보다는 레즈비언 커플이 훨 낫다고. 이것은 비단 문제 뿐만이 아니다.

—『니아까』 8호, 「레즈비언은 부르조아만 있는가?」, 깨트펑, 1998

왕따 니아까. 사실 예전부터 ‘니아까’는 별볼일 없는 잡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있는 줄 아는 줄 모르는 우리끼리만 아는 잡지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왕따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리고 레즈대중잡지가 되겠다는 야무진 목표를 꾸겨버렸다. 무신 대중잡지냐? 웃기지마라. 대중은 니아까를 원하지 않았다. 게을러터진 년들이 꿈지럭대고있는 니아까는 이제 더 이상 레즈의 소리통이 아니었다. 우리만 소리통이네 어쩌네 떠들어댄거였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건데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행위들은 어찌보면 소수를 위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니아까』 10호, 「편집장의 수다」, 깨트펑, 연도미상

어떤 레즈비언들은 다이크 특공대를 꾸려 약한 게이 몇 대 때려주면 싸움이 간단하게 끝날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마존’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고립되고 반사되고 지워지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게이들이 울부짖던 성적 다원주의, 민주주의를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배려해달라고 때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렵더라도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알지?

—『또다른 세상』 2호, 「게이에서 남성으로 여성에서 레즈비언으로」, 정혜등, 1996

최소한의 합의로써 ‘여성사랑하는 여성’이라는 레즈비언의 정의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비판적으로 논쟁되어지고 재구성되고 협상되며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의 규범적인 당위는 분명 존재한다. “우리의 언어로써 우리의 경험을 설명하고 스스로 이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다른 세상』 2호, 「이성애제도와 레즈비언」, 김지혜, 1996

레스보스! 이제 서울에 첫발을 내딛은 첫 레즈비언 카페.. 그것은 레즈비언 역사에 있어서 중대한 출발을 의미한다. 이제 한국에도 레즈비언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문화의 장이 생겼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이벤트를 열겠다는 레스보스! 우리가 그 미래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또다른 세상』 2호, 「레스보스, 레즈비언문화공간 레스보스를 찾아가다」, 강모선, 1996

좀 돌리지 말고 물어봤어야 했다. 레즈비언들이 페미니스트들에게 너희는 남자랑 싸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적과의 동침을 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 했고, 페미니스트들은 레즈비언들에게 한 남자도 바꾸지 못하면서 어떻게 너희들의 사랑이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냐고 물었어야 했다.

—『또다른 세상』 5호, 「다이크소녀, 페미니즘을 만나다」, 1997

한국에도 레즈비언이 있어요?’ 8월 9일 ALN(Asian Lesbian Network) conference가 열리는 대만에 도착했을 때 각국에서 온 레즈비언들이 한국에서 왔다는 나를 보고 처음으로 했던 말이다. 이럴 수가. 그러나 사실 그런 의문과 놀람도 무리는 아니다. 그만큼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들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었고 자신을 알리는 목소리 또한 없었으니까. 우리나라에서는 레즈비언이 무엇인지, 동성애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아마 많을 것이다.

—『끼리끼리소식지』 1995년 11월호, 「​​우리의 힘, ALN참가기」, 전해성, 1995

한: 오늘의 집회는 내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 훈 : 쌍용자동차 노조의 노동자가 ‘동성애자 연대투쟁, 노동악법 철폐하자’는 구호를 외쳐주었다. 정말 용기가 솟았다. 석 : 극장에서 소식지 돌릴 때보다 반응이 좋았다. 전경 방패에 붙어있던 핑크 트라이앵글이 인상적이었다. 순 : 집회는 난생처음이고, 레즈비언으로서 나와야 한다는 사명감에 나왔다. 너무 무서웠지만 앞으로도 계속 참여하고 싶다. 안 : 우리만 나설 게 아니라 동성애자 내부로 확산시켜야 할 것 같다. 순 : 투쟁은 축제이다. 신나게 웃고 떠들며 투쟁한 것이 자랑스럽다.

—『친구사이』 14호, 「무지개 퍼레이드 후기」, 1997

올 5월에도 예외없이 동경 국제 레즈비언 게이 영화제가 열렸다. 주의하시랏! 그 예외 없다는 말을. 우리 서울퀴어영화제의 각별한 ‘예외적인’ 사정에 견준다면, 그들은 더없이 행복하다. 이제 연륜이 찰대로 찬 동경 국제 영화제의 소식을 예지감치 접했지만 서울퀴어영화제는 참가할 수 없었다. 이미 석달째 사무실 임대료가 밀린 처지에 먼발치에서 응원하는 수밖에.

—『퀴어씨네뉴스』 2호, 「동경국제레즈비언게이 영화제에서 알려온 연대의 메시지」, 1998

서울퀴어영화제가 소동을 일으킵니다. 저희는 이성애 문화의 틈새를 해집고 들어가는 퀴어문화혁명의 게릴라들을 찾습니다. 서울퀴어영화제는 “레즈비언, 게이, 성 전환자로서 혹은 성의 무법자로서 자신을 옹호하고 표현하는 모든 문화적 작업”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퀴어들이 탁월하고 근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조악하고 무디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을 위한 문화 예술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비로소 더듬거리며 비틀거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우리의 모든 언어들을 한자리에 모으고자 합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누락된 퀴어들의 언어의 권리, 그리고 그 미래”야말로 서울퀴어영화제제의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팩토리뉴스창간호, 「퀴어문화혁명의 게릴라들을 찾습니다」, 1997

오늘 하루 아르바이트루 일당 5마넌에 일본고딩 가이드를 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을 6명을 데리구 다녔었는데⋯ 명동에서 그 아이들이 나보고 “레즈⋯? 레즈⋯? 아나타 레즈??이러는 것이다. 흠짓⋯ 아니 이것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하구 무지 놀랐다. 티나게 행동한 거 하나두 없었구만⋯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을 하냐구 했드만⋯ 내가 같이 알바하던 여자애하구 팔짱을 끼구 걸어다녔기 땜에 레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선 친구들끼리 이러구 다니는 거 보통이라구, 짧은 일본어루 열심히 설명해 줬다.

—『또하나의 사랑』 10호, 「일본 아이들이 나보고 레즈냐구⋯」, 1998

예전부터 종로 쪽에서부터 쓰이는 속어로 남성 역의 사람들 땟자, 여성 역의 사람을 맞자, 그리고 양 역할이 가능한 사람을 전차라 합니다. 하지만 요즘 많은 게이들에겐 그리 특별한 구분이 없고 이 용어는 잘 쓰이지 않습니다.

—『또하나의 사랑』 8호, 「게이가 알고싶은 레즈비언, 레즈비언이 알고 싶은 게이」, 1997

또사모에서 게이들을 알게되면서 느낀 것이 게이들이 보통의 남자들보다 훨씬 낫다는 점이었다. 일반 남자들같은 남성권위주의적인 사고가 없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고 즐긴다기 보다는 자포자기적 인생을 산다거나⋯ 성욕을 콘트롤 할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또하나의 사랑』 8호, 「게이가 알고싶은 레즈비언, 레즈비언이 알고싶은 게이」, 1997

‘기혼’이라는 단어 안에 ‘남편’과 ‘아이’가 겹쳐 보이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연애는 모두 불륜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사회적으로 말하기에는 불륜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성정체성은 유동적인 것이라 평생 이성애자로 살아오다 결혼한 뒤에 레즈비언임을 깨달았을 수도 있고, 바이인 줄 알았다가 레즈비언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도 있다.

—『레인보우링』 season3 3호, 「기혼이반 커플」,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