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2022...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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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발행한 『초동회 소식지』 이후, 한국의 퀴어(비연속/연속)간행물의 문장을 수집하고 연결하는 공간입니다. 발견한 문장을 보내주세요.

당신 잡지는 쓰레기같어,,, 이반 업소 알려주는 것만 빼고,,,당신은,,, 잡지 발행자랍시구,,, 생각하겠지만,,, 만들려면 똑바로 만드는게 낫지 않나, 당신 성격은 잡지만 봐도 알겠군,, 이반 잡지 만드는게 쉬운거 아니라는 것 알지만,, 당신이 만드는 잡지가,, 일반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이반들의 얼굴이 될 수 있는 잡지를 그렇게 만드느니,, 그만두는 게 나을 듯 싶어,,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리고 무슨 인권 운동가인 냥 행동하는 모습도 좋게 비춰질 리 없구,, 니 속엔 어떤 것들이 들었는지 몰라도,, 한 번 더 생각하구, 행동하길,, 충고차,, (최근 인터넷에 올라온 몇몇 분의 글입니다)

—『보릿자루』 21호, 「독자들의 한마디, ‘되먹지도 않은⋯’」, 2000

“이해가 안되네요, 퍼레이드참여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있고, 선글라스를 낀 나라는 한국 뿐일거라고 생각해요. 퍼레이드는 일종의 커밍아웃으로 통하는데 한국은 아닌가봐요” 38세의 일본인 독립영화 감독 고히치씨의 말이다.

—『보릿자루』 42호, 「조선의 호모종로를 주름잡던 날」, 김재원, 2003

1997년5월 21일로부터 태어난 안전지대는 이제껏 비활동적이고 음성적이던 부산, 경남지방레즈비언들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꼭 동성애자가 아니더라도 여성으로 겪는 사회적인 사회적인 부당함 등을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별성정체성을 떠나 이반인(二般人)인 우리가 일반인이라고 하여 배척하지 않으며 다수인 그들 속에서 당당한 인격체로서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자기 자신부터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자신을 바라보아야 되지 않을까.

—『안전지대창간호, 「내는 글⋯.」, 1997

“여보세요?” 내가 전화를 걸었을 때는 분명히 호출을 했었을 그 장본인은 전화를 받지 않고 엉뚱한 꼬마 아이의 목소리만 들렸다. ‘아뿔싸!’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어야 옳은 일이건만, 나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꼬마의 아빠가 내게 호출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혹시 아빠 계세요?”라고 물었고, “네, 목사님요? 우리 아빠 목사님인데요” 그 꼬마는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대답을 또박또박했다. 엉겁결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난 뒤 밀려드는 그 후회스러움⋯ 그리고⋯ 예의 그⋯ 불쾌감⋯.

—『우리누리』 봄호, 「혹시 목사님도 호모세요?」, 보릿자루, 1998

나-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겨울호 우리누리가 나온 뒤로 내 머리 속은 온통 회지 생각뿐이었다. 얼떨결에 맡게 된 편집은 겨울호의 어눌함에 이어 이번 봄호에선 고통으로 이어졌다. 겨울호에서의 어눌함을 다신 반복치 않으리란 내 앙탈스러움은 겨울호가 발간된 직후부터 기사 모으기, 편집 공부, 나중에는 프린터기까지 사게끔 만들었다. 모든 것을 나 혼자서 해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나중엔 오기로 바껴서 일의 추진력이 되었는데⋯⋯ 컴맹에 가까웠지만 회지 특성상 일반 친구들에게 편집의 know-how를 문의하기도 어려웠던지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더딘 작업이 요구되었다. 마지막 일주일간은 먹고, 자고 씻은 기억이 별로 없다.

—『우리누리』 봄호, 「편집후기」, 1998

진심으로 대경회 모임 결성 1주년축하하며 한없는 애정과 신뢰를 보냅니다. 어떠한 의미에서건 동성애자들이 연결망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서울에 편중된 현재의 동성애자 문화에서 지방모임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더욱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꾸준히 모든 동성애자들을 위해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을 모색하고 그에 따라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을 바랍니다. 아울러 동성애자들의 전국적인 연결망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서울시립대학교 동성애자 모임레스보스’대표 양지용, 1997

대구경북지역 동성애자 모임인 ‘대경회’의 1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또하나의 사랑1주년 기념 모임에서 회장님을 통해 ‘대경회’가 지방을 중심으로 의욕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펴고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동성애자 단체들이 수도권에 집중되어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대경회'의 그와 같은 활동은 매우 고무적 활동이라 생각됩니다. 아직까지 ‘대경회’와 ‘또하나의 사랑’사이의 눈에 뛰는 교류는 없었지만 앞으로 우호적인 동반자로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아무쪼록 1주년을 맞이한 ‘대경회’가 지방에 거주하는 많은 동성애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서 지방의 중추적인 모임으로 계속 발전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대경회1주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우리누리1』, 「각 단체장 축하메시지」, 하이텔 동성애자모임또하나의 사랑’ 시샵 저스티노, 1997

대경회가 새로운 소식지를 발행한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축사를 올립니다. 해마다 한국 귀국 길에 발전해 나가는 서울동성애 인권운동 단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감격하기도 또한 걱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유교적 사상으로 봉건적인 사회에서 자리잡게 되었던 동성애 단체의 의지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반면에 날이 갈수록 ‘서울’ 중심으로만 몰려지게 되는 현 동성애 인권운동지역성은 지방에 계신 동성애 동포 여러분들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될 수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구경북지방에서도 자치적인 동성애 인권 소식지를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누리1』 「인간적인 정으로 이어주는 소식지가 되기를 바라며」, 장진석, 1997

11월 23일,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정기모임이 있는 날. 사람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범일동에 위치한 텔레폰이라는 곳의 문을 열었지만, 막상 나를 맞아주는 건 썰렁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룰루랄라~~” 히죽거리며 “송지나의 취재파일”을 봤다. 4명의 여성들이 얼굴을 공개하고 자신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그들이 TV라는 파급효과가 큰 매체에 COMING OUT(커밍아웃-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용기가 필요했을까? 방송이 나간 후 겪었을 부당한 대우와 주위의 시선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한두 명씩 사람들이 들어섰다.

—『같은마음』 7호, 「첫번째 만남」, 낮은 목소리, 1998

난 아무것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씩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날 위로하려 들거나 감싸 안으려 들때까지 말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 곁에서 조용히 두 손으로 감긴 내 두 눈을 쓰다듬어올려주는 손이 있습니다. 한울타리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의 손길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작은 바램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울타리』 6호, 뒤표지, 1999

이반이어서 외롭고 우울하니까 나는 많은 일을 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을 폭넓게 알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보이지 않게 사랑함으로 아픈 만큼 사람을 이해하고, 상처를 어루만져 줄줄 알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보도블럭 사이에 핀 꽃을 발로 차지 않고, 한참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아픔과 슬픔만큼 기쁨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이반이어서 가마타는 즐거움 뒤에 가마 매는 괴로움도 있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사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고, 오래오래 보게되면 된다는 믿음을 알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하고, 사랑의 힘을 믿게 해주었다. 이반이어서 “인간적이란 말”의 뜻을 알게 해 주어서. 이반이어서, 이반이어서..

—『너와나창간호, 「⚨.이반이라서⋯..」, 하섭님, 1999

음⋯. 이반 세계를 알고 몇 번 이태원을 다녀왔지만 사실, 아직도 그곳에 대해 뭐라고 딱히 하고 싶은 말은 없다. 갈 때마다 이태원이 내게 주는 느낌은 달랐다. 처음엔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세계 같은 느낌이 들었고 다음엔 차차 호기심 어린 곳이 되었고, 때때론 이반세계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 같은 회의를 들게 하였고, 어쨌든 지금은 심각하게 생각 않기로 했다. 일반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 떠들고, 마시고 도 부려볼 수 있는 장소가 내게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너와나창간호, 「필이가 이태원에 간 까닭은?」, 유필, 1999

왕따 니아까. 사실 예전부터 ‘니아까’는 별볼일 없는 잡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있는 줄 아는 줄 모르는 우리끼리만 아는 잡지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왕따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차리고 레즈대중잡지가 되겠다는 야무진 목표를 꾸겨버렸다. 무신 대중잡지냐? 웃기지마라. 대중은 니아까를 원하지 않았다. 게을러터진 년들이 꿈지럭대고있는 니아까는 이제 더 이상 레즈의 소리통이 아니었다. 우리만 소리통이네 어쩌네 떠들어댄거였다. 그래서. 생각을 해보건데 우리가 지금 행하고 있는 행위들은 어찌보면 소수를 위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니아까』 10호, 「편집장의 수다」, 깨트펑, 연도미상

다이크, 격주간 신문으로 동성애자 인권연대 기관지 Dyke는 98년 3월 15일에 창간되어 격월간 발행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2호 이후 신문을 발간하지 못하였고 이를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며, 98년 11월부터 매월 두 번의 발간을 목표로 3호를 발간하였다. 기존의 다이크와는 외양에서 차이가 있으나, 알찬 기사를 약속드린다.

—『다이크』 3호, 「다이크, 격주간 신문으로」, 1998

동성애 문제’만 가지고 ‘인권! 인권!’ 하기에는 너무 이기적이고 편협한 문제 접근이란 생각이 든다. 동성애 사회가 모든 차별받는 집단들의 문제 해결에 같이 뛰어들어야 ‘동성애 인권문제’도, ‘진보적 노선을 걷고 싶지만 왠지 모르게 이성애 관점만큼은 포기하질 못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같은 인권 문제로 비로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동성애자들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사이2000년 6월호, 「동성애자들이 ‘안티미스코리아’에 열광해야만 하는 이유」, 정기상, 2000

#힘망찬 소식 하나.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하며 각자의 목소리를 담았던 동성애자 단체들이 드디어 연대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남성 동성애자 인권모임인 ‘친구사이’, 여성 동성애자 모임끼리끼리’, 그리고 새로운 동성애 문화를 열어가는 ‘버디’ 등 전국 27개 동성애 단체들이 5월 31일 세종대에 모여 ‘한국 동성애자 협의회’ (가칭)을 결성하였습니다. 아직 정확한 활동과 모임의 명칭이 결정되지 않았지만 전국동성애자단체들의 대표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스스로의 문제점과 동성애자 인권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박수를⋯

—『퀴어씨네뉴스』 2호, 「HOMO OFFICE」, 1998

서울퀴어영화제가 소동을 일으킵니다. 저희는 이성애 문화의 틈새를 해집고 들어가는 퀴어문화혁명의 게릴라들을 찾습니다. 서울퀴어영화제는 “레즈비언, 게이, 성 전환자로서 혹은 성의 무법자로서 자신을 옹호하고 표현하는 모든 문화적 작업”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퀴어들이 탁월하고 근사하기보다는 차라리 조악하고 무디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을 위한 문화 예술의 공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비로소 더듬거리며 비틀거리며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우리의 모든 언어들을 한자리에 모으고자 합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누락된 퀴어들의 언어의 권리, 그리고 그 미래”야말로 서울퀴어영화제제의 전망이기 때문입니다.

—『팩토리뉴스창간호, 「퀴어문화혁명의 게릴라들을 찾습니다」, 1997

오늘 하루 아르바이트루 일당 5마넌에 일본고딩 가이드를 하였다. 고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들을 6명을 데리구 다녔었는데⋯ 명동에서 그 아이들이 나보고 “레즈⋯? 레즈⋯? 아나타 레즈??이러는 것이다. 흠짓⋯ 아니 이것들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하구 무지 놀랐다. 티나게 행동한 거 하나두 없었구만⋯ 그래서 왜 그런 생각을 하냐구 했드만⋯ 내가 같이 알바하던 여자애하구 팔짱을 끼구 걸어다녔기 땜에 레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선 친구들끼리 이러구 다니는 거 보통이라구, 짧은 일본어루 열심히 설명해 줬다.

—『또하나의 사랑』 10호, 「일본 아이들이 나보고 레즈냐구⋯」, 1998

또사모에서 게이들을 알게되면서 느낀 것이 게이들이 보통의 남자들보다 훨씬 낫다는 점이었다. 일반 남자들같은 남성권위주의적인 사고가 없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하고 즐긴다기 보다는 자포자기적 인생을 산다거나⋯ 성욕을 콘트롤 할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또하나의 사랑』 8호, 「게이가 알고싶은 레즈비언, 레즈비언이 알고싶은 게이」, 1997

그러니까 저는 페미니스트거든요. 그리고 게이는 당연히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단톡방이나 다른 모임에서 만난 친구들은 안 그런 친구들이 많은 거예요. 자기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 완전 무관심하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나의 권리나 인권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지 잘 이해를 못 하고요. (⋯) 그리고 동갑 단톡방이나 같은 직종 단톡방 사람들끼리 만나도 우리는 같은 인생을 사는 동료들이라는 느낌보다는, 만 마시고 플러팅의 목적만 있고⋯ 이런 것들이 부정적으로 느껴질 때 지보이스를 나와봤어요.

—『보릿자루 산책하기창간호, 「Y」, 2022